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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값없는 노동'에 막막..2030 연구자들에 주거·연구 공간 준다
    주제 2020. 9. 4. 16:31

    정부, 비정규직 강사·대학원생 등 위한 공동체 사회주택 추진

    [경향신문]

    그래픽 | 김덕기 기자

    국토부·LH, 교육부와 사업 협의
    연구자 절반가량이 활동하고 있는
    서울지역에 시범부지 마련할 듯
    무주택·소득 70% 이하 제한 예정

    정부가 비정규직 강사와 연구자를 위한 공동체 사회주택을 추진한다. 교육당국의 연구지원 사업에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주거복지 정책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지원 모델이다.

    대학 상업화와 연구 노동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서울지역에 집중된 2030세대 연구자 상당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들은 각종 사회보장 혜택에서 소외돼 있다. 사회주택에 입주하는 연구자들은 ‘집’을 매개로 지역사회의 지식공유 활동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20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교육부와 협업해 강사 및 연구자를 위한 사회주택 정책을 추진 중이다.

    LH는 올해 3월 교육부, 연구자 단체 등과 이 사업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6월 연구자 주택 입주수요조사 용역을 시행했으며, 한국연구재단 및 연구자 단체와의 토론을 통해 사회주택을 어떤 형태로 꾸릴지 논의 중이다. LH 관계자는 “현재 시범사업 부지 선정 작업 중”이라며 “부처 간 협의 및 수요 발굴을 통해 직역 특징에 따른 수요 맞춤형 주택을 앞으로도 계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교육부 등의 연구지원 사업은 대학이나 연구소 등 큰 기관에 연구 지원금을 주는 방식에 집중돼 있었다. 비정규직 연구자들은 주거와 결합한 연구지원 사업이 저소득 연구자들에게 실효적인 혜택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시범사업 부지는 서울지역에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상당수 연구자들이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몰린 서울지역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연구자 단체 ‘연구자의집’이 올해 6월27일~7월24일 545명의 연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269명(49.7%)이 서울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절반 정도(49.6%)가 2030세대인 이들은 상당수 비정규·저소득 노동자로 일했다.

    기존 공공임대 제공 물량의 일부를 연구자 몫으로 떼어오는 것인 만큼 사회주택 입주는 경제 상황을 고려해 ‘무주택세대 구성원으로서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 70% 이하인 자’ 등으로 제한할 예정이다.

    서울 소재 대학·대학원에서 문화연구 박사과정을 수료한 전성희씨(34·가명)는 연구활동으로 돈을 벌었던 경험을 묻자 “강의조교로 6개월에 100만원을 벌었던 것, 책 두 권을 내고 선인세로 100만원씩 받았던 일 등이 생각난다. 종이 매체에 글이 실려도 원고료를 항상 받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는데, 사실 생활비는 야간에 하는 바텐더 아르바이트로 메꾼다. 교복 판매도 했다. 내 노동의 증명을 ‘연구자’라는 신분으로 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사회주택에 소득기준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기준을 못 채울 연구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도 연구공간도 없는 2030 연구자

    2000년대 이후 상업화된 대학에서
    도서관·세미나실 등 공간 부족해져
    정규 연구 기반 닦지 못한 연구자에
    주거 외 연구 공동체 공간 마련도

    자신을 ‘독립연구자’라고 칭하는 박지형씨(31·가명)는 서울 마포구에서 보증금 4000만원, 월세 60만원짜리 투룸에 산다. 함께 살던 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 집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이다. 그가 버는 돈으로는 월세 60만원을 감당하기 어렵다. 서울 소재 한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외교·사회학을 공부한 박씨는 현재 한 연구공동체의 회원이자 시민단체 상근 활동가다. 연구공동체는 대학이 아닌 외부에서 찾았다. 연구모임 사무실은 마포에 있다. 월세 120만원을 참여자들이 나눠 낸다. 돈이 들지만, 대학에선 찾기 어려웠던 모임이라 소중하다.

    박씨는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교육과정을 찾기 어려웠다. 대학원에도 공부모임이 있었지만, BK21사업을 따거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활동에 치중했다. 학생들도 진학이나 유학 준비에 도움이 되는 모임을 선호했다”며 “세월호나 밀양 송전탑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연대하면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외부 공부모임을 찾았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2000년대 이후 대학이 지성의 전당으로서 역할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 학내 연구모임 등이 활발했던 때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엔 대학에 다수 상업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좁은 서울 땅에 모여 있는 대학들은 기숙사는커녕 도서관이나 세미나실도 충분히 제공하기 어려워졌다.

    전성희씨는 “2000년대 학번들부터는 학내 공간이 엄청나게 부족해지는 경험을 했다”며 “학교에서 세미나실이나 도서관을 충분히 제공할 형편이 안 돼 외부 공부모임을 찾거나 카페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대전 출신인 전씨는 대학 입학 후 서울로 이주했다. 월세를 전전하다 부모님 도움을 받아 현재 집으로 옮겼다. 이 집에도 여전히 공부할 공간은 없다. 전씨는 “석사논문과 단행본 작업은 집 앞 카페에서 주로 했다”며 “그것도 눈치가 보여 최대한 사장보다는 아르바이트생이 있는 곳, 넓고 손님이 많은 곳을 찾았다. 세 시간에 한 번씩은 음료를 시키는 무언의 원칙을 지키려고도 노력했다”고 말했다.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 안정적인 연구 기반을 닦지 못한 연구자들이 양산되는 상황에서 연구자 단체들은 사회주택을 통해 주거 외에 연구공동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 마련에도 집중할 예정이다. LH와의 사회주택 논의에 참여 중인 연구자의집 관계자는 “100~150호 정도의 주거공간 외에 강의와 세미나가 이뤄질 수 있는 공간, 지역주민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사회주택에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의 ‘값없는 노동’

    연구자 상당수 ‘돈 안 되는 연구’
    사회보장제 혜택 제대로 못 받아
    공공성 있는 기초연구 지탱 기대

    사회주택 수요 파악을 위한 설문조사에 참여한 이들은 상당수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생 및 강사 등이다. 응답자의 42.1%가 비정규직 강사였고, 21%가 대학원생이었다. 30대가 38.4%로 가장 많았고, 이어 40대(32.4%), 20대(11.4%) 순이었다. 소득수준은 100만원 이상~150만원 미만이 19.4%로 가장 많았고, 이어 150만원 이상~200만원 미만(18.1%), 200만원 이상~250만원 미만(17.4%), 100만원 미만(14.3%) 순이었다. 수입이 거의 없다는 응답도 9.3%였다.

    김정만씨(42·가명)의 달력에는 날짜마다 학생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자기소개서 첨삭을 해줄 과외 학생들이다. 그의 현재 주수입원은 과외활동이다. 서울 한 대학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영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김씨는 “강사나 연구자라고 하면 사회적인 이미지가 나쁘지 않지만, 전임교원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연구나 강의 활동만 해서는 가정을 꾸릴 수 없다”며 “버팀목전세자금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다가 소득증빙을 떼어보니 과외를 하지 않은 2017년에는 1년 소득이 10만원이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2017년 연구 노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정부 용역사업 등 돈 되는 연구가 아니면, 개인 논문활동이나 연구는 사회적으로 ‘값이 매겨지지 않는 노동’이 된다.

    김씨는 “의미있는 외국 연구를 계속 번역하는 분이 계신데, 독립연구자라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며 “책이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니 돈이 되지 않는데도 그 분은 개인적인 연구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은 공공성이 있는 노동을 하지만 어떤 사회보장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과외를 하면 벌이가 나쁘지는 않다. 쉬지 않고 몇 달 일하면 2000여만원을 손에 쥘 수도 있다. 다만, 김씨가 하고 싶은 일은 과외가 아니라 연구다. ‘돈을 생각해 모두 과외 시장으로 빠져버리면 기초학문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도 머리를 맴돈다.

    전성희씨는 “대학원 입학 후 약 10년간 끊임없이 공부했지만, 근로소득을 만들 수 없는 삶이었다. 의료보험도 아버지 밑에 있고 국민연금도 지역가입자”라며 “한국 사회가 ‘당신은 어른’이라고 인정하는 표식 어느 하나에도 안 맞는 사람이라 가끔 부모님에게 죄송하다. 연구자 상당수가 2030세대 기간을 어떤 사회보장제도의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산다”고 말했다.

    ■연구자에게 왜 공공임대를 줘야 하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지난해 12월 경기 부천시 영상문화산업단지 내에 짓겠다고 밝힌 ‘웹툰융합센터 및 부천영상 청년예술인 주택’의 조감도. LH와 부천시는 이곳에 청년예술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사회주택 850가구를 공급해 청년예술인들의 주거안정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다. LH 제공

    향후 예술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
    공공 주거 확대 이어질 가능성

    정부는 한부모가정, 저소득층 등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한다. 장기적인 취업난과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축 속에서 내집 마련이 어려운 청년이나 신혼부부에게 특별히 제공되는 물량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공공임대 물량은 모자란다. 이런 상황이어서 ‘연구자 사회주택’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김정만씨는 부인과 함께 현재 경기 시흥시에 산다. 집은 보증금 7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이다. 보증금 7000만원 중 3000만원을 버팀목대출로 은행에서 빌렸다. 연구활동은 주로 서울에서 하지만, 주거지를 옮길 생각은 못하고 있다. 김씨는 “이 돈으로 서울 집을 구하면 주거환경이 너무 안 좋을 것이 뻔하다. 배우자도 연구자라 집에 책이 많은데 더 쌓아둘 곳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개정 고등교육법(강사법) 시행 이후엔 연구자들 사이의 빈익빈부익부도 심해졌다.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된 강사법은 ‘대학이 강사를 1년 이상 임용해야 하며, 3년 동안 재임용 절차를 보장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시행을 앞두고 대학이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강사를 대량 해고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교육부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학기 약 7834명의 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 중 전업강사로 활동하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4704명으로 파악됐는데, 인문사회계열(1942명), 예체능계열(1666명), 자연과학계열(633명), 공학계열(362명), 의학계열(101명) 순이었다.

    김씨는 “고용 안정을 위한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강사법이 시행되며 강사들 사이 격차가 커졌다”며 “일부 고용이 안정된 이들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문조사에 참여한 이들 중 강사법 시행 이후 소득이 ‘줄었다’고 답한 이들은 21.8%다. 이들은 월평균 100만원의 소득이 줄었다고 했다. 반면 ‘늘었다’고 말한 이들은 11.1%로 평균 50만원이 증가했다고 답했다.

    연구자 외에 사회보장에서 소외된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공공 주거 확대도 추진 중이다. LH는 지난해 부천시에서 ‘부천영상 청년예술인 주택’ 기공식을 열었다. 연구자들은 이번 사업을 계기로 예술가, 연구자 등 사회의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들의 노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대학이나 기관, 연구소 등 큰 규모의 단체에 쏠리는 지원이 아닌 풀뿌리 연구자들에게 적재적소의 지원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박지형씨는 “기초연구 등 사회적으로 공공성이 있는 분야도 시장논리에 휩쓸려 사장됐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지만, 이를 학문적으로 지탱한 인력은 계속해서 붕괴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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